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문단 편집)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와의 악연 ===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 글라주노프 생존 당시 쓰여졌으며, 마침 글라주노프도 말년에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스트라빈스키로서는 어느 정도 선배에 대한 존중심이 있던 시기라 보면 된다.]에 따르면 그는 음악 인생 초기에 자신보다 17살 선배였던 글라주노프를 매우 존경했으며 음악가로서 자신의 모범으로 여겼다.[* 현재 글라주노프와 스트라빈스키가 갖고 있는 위상의 격차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안되겠지만, 당시에는 이게 당연했다. 글라주노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수제자로 계속 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나갔던 반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기초가 안 되어 있다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한번 퇴짜를 맞았으며, 어렵게 그의 제자가 된 후에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첫 교향곡(op.1)을 글라주노프의 교향곡을 많이 참고해서 작곡했으며[* 다만 이 스트라빈스키의 첫 교향곡은 스트라빈스키의 개성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습작풍의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 전집에 수록할 목적이 아니면 잘 연주되지 않는다.] 글라주노프의 현악 사중주를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글라주노프의 태도였는데, 보수성향의 글라주노프는 스트라빈스키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를 음악가가 아니라 관현악 기술자 정도로 취급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첫 교향곡을 들은 후 직접 스트라빈스키에게 "왜 이렇게 관현악을 무겁게 썼어?"라고 비판했다.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불꽃놀이(op.4)[* [[디아길레프]]가 듣자마자 스트라빈스키를 전격 발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를 들은 후에는 '재능이 보이지 않고 불협화음만 가득하다'고 평했으며, [[페트로슈카]]에 대해서는 '이건 음악이 아니고 다만 관현악 처리가 돋보이는 음향'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계속되는 글라주노프의 냉담한 태도에 속으로 분노를 쌓아가던 스트라빈스키는 이후 글라주노프와의 인연을 끊었으며, 음악계의 거물이 된 이후에는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운 인물'이라고 평했다. 스트라빈스키는 80세가 되던 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방문했는데, 음악원에 걸려있는 글라주노프의 사진을 보자 '글라주노프!'라고 외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글라주노프는 말년인 1930년대에 [[파리(프랑스)|파리]]에 머물었는데, 당시 프랑스 최고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 합작하며 음악계의 중심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스트라빈스키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